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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의 여행생활歌

운남중독 # 02_ 타시텔레, 당신의 행복을 빕니다

여행생활자를 넘어 생활여행자를 꿈꾼다.
일상에서도 여행자의 마음가짐으로, 매 순간 여행자의 태도로 살고자 한다.
여행지에서 기꺼이 할 수 있는 것들을 삶 속에서도 실천하려고 한다.
여행이 곧 일상이 되는 순간, 일상이 곧 여행이 되는 순간 삶이 조금은 더 여유로워지지 않을까

 

 



회사를 그만두고 딱히 여행을 가야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퇴사시기에 마침 두 차례의 인솔이 있었고, 가는 김에 이왕이면 비자 만기일까지 머물다 오면 좋겠다 싶었다. 그렇게 두 달, 돌아오는 것 보다 머무는 것이 쉬워서 택한 리장(중국 운남성에 있는 해발 2400m의 고원도시)살이었다. 한 달쯤은 동네 백수로 지냈다. 작은 시장이 있는 동네에 살았기에 멀리 움직일 일이 별로 없었다. 느지막이 일어나 허씨 아저씨네에서 만두를 사먹고, 친구네 놀러가 수다를 좀 떨다 점심을 (주로 얻어)먹고, 미로 같은 고성을 헤매듯 산책하다 보면 어느새 공기가 차가워졌다. 해 지기 전 군것질거리와 과일을 잔뜩 사서 집으로 돌아오면 하루일과를 마친 셈이었다. 특별할 것 없는 이런 일상을 반복하다 동네백수 생활이 슬슬 지루해질 때쯤 떠오르는 곳이 두 곳 있었다. 역시, 모두 산이었다.




 




 




 




 

# 마음에 품은 나의 첫 산
그 중의 하나, ‘매리설산’. 문득 이름을 되뇌다 보니 오래전 B가 한번쯤은 꼭 가보고 싶다했던 그 산이었다. 오래 전 B와 같이 갈 기회가 있었으나 그렇게 되진 않았고, 그 뒤로 몇 번 꿈같은 이야기를 나눴지만 서서히 잊혀져갔다. 이번에 이렇게 불쑥 튀어나온 걸 보니 아마 그때부터 마음에 품은 모양이다.
무언가를 마음속에 오래 품고 있으면 언젠가는 만나고 마는 법(이라 믿고 싶다). ‘간절히 바라면 온 우주가 마음을 모아 도와준다’는 동화같은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실제로 본인이 무언가를 바라고 마음에 품게 되면 알게 모르게 준비를 하게 되고 그러하다 보면 자연스레(실은 스스로 움직여서) 이루어지기도 하는 것 같더라.

 

그렇게 마음에 품고 있던 나의 첫 산을 가게 되었다. 4-5천 미터 고개가 굽이굽이 이어지는 길을 하루에 한 두 대쯤 있는 버스를 타고 이틀에 걸쳐 도착했다. 산에 도착하기도 전에 나는 이미 뱉을 수 있는 감탄사는 다 뱉은 상태였다. 실제로 존재하지 않을 것만 같은 풍경들을 마주했다. 360도 파노라마로 펼쳐진 설산이 왠지 모르게 든든했다. 5대가 덕을 잘 쌓았는지 매일매일 날이 맑아 저녁엔 손톱달도, 쏟아지는 별도, 은하수도 볼 수 있었고 아침에는 황금빛으로 서서히 물들어가는 설산의 모습도 실컷 볼 수 있었다. 다른 여행객들이 바삐 배낭을 꾸려 산으로 떠난 후에야, 해가 두둥실 중천에 뜬 후에야 어슬렁 산책을 시작했다. 우리는 급할 것 없는 가난한 시간부자였다.




 




 




 

# 타시텔레, 당신의 행복을 빕니다
업보와도 같은 커다란 배낭을 메고 드디어 산을 올랐다. 한 걸음, 한 걸음 뗄 떼마다 고도가 높아져서 숨이 턱까지 찼고 걷는 시간만큼 쉬어야했다. 몇 만원이면 나귀 등을 빌려 짐을 실을 수도 있었지만 무슨 고집인지 굳이 10kg에 달하는 배낭을 메고 꾸역꾸역 산을 올랐다. 

 

메리설산은 고도가 높은 대신 위도는 낮아 온대와 열대의 식생을 모두 만날 수 있다. 이런 높은 고도에서 이렇게 울창하고 푸른 나무들을 볼 수 있다니! 오랜 시간을 살아낸 나무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판타지 영화 속의 한 장면처럼 나무들이 대화를 나누고 있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산의 기운이 맑기 때문이리라. 감탄은 잠깐이고 내 한숨 챙기기 바빠 남들보다 배는 더 걸려 마을에 도착했다. 윗마을은 신비로웠고, 아랫마을은 아름다웠다. 마을에 마음을 빼앗겨 산으로 오르는 수직걷기를 거두고, 마을안을 어슬렁거리는 수평걷기를 택했다.




 




 




 

# 성스러운 폭포속으로

티벳의 여러 성산들은 각각 해당되는 ‘년(年)’이 있다. 양의 해에는 매리설산의 주봉인 카와커보봉을 참배하기 위해 많은 티베트 사람들이 모여든다. 2003년의 경우에는 코라(산 한바퀴를 돌면서 참배하는 것)을 위해 약 5만명의 티벳탄들이 찾았다고 한다. 2015년인 올해가 바로 12년만에 돌아온 양의 해. 지난번에 산만 바라보느라 가지 못했던 신폭(神瀑)을 가기로 했다. 신폭의 물을 맞으면 업을 씻을 수가 있다고 해서 코라순례를 하는 티베트 사람들도 그 기운을 전해 받기 위해 두 손을 모으고 폭포에 다가간다.









두 번째 방문했을때는 우기였기에 신폭으로 가는 길은 엉망진창이었다. 그야말로 ‘진창’. 비가 와서 미끄러운데다 말똥까지 범벅이 되어 있어 한걸음 한걸음 딛을 곳을 찾는게 일이었다. 하지만 신폭으로 가는 길은 성스러웠다. 오르는 것이 아니라 들어간다는 느낌이었다.


과연 12년마다 돌아오는 귀한 해여서 그랬는지 어른들 등에 업힌 아직 걷지도 못하는 갓난쟁이부터, 지팡이를 짚고 걸음을 떼는 노인까지 열에 아홉은 티베트사람들이었다. 그들은 평생 한 번 이 길을 걷기 위해서 멀리 운남, 사천, 청해성에서 찾아온다. 꼬마 아이의 손을 잡고 신폭으로 올라가는 어머니는 매리설산으로 향하는 날 아침 아이에게 가장 고운 옷을 골라 입히고 가지런히 머리도 단장해 주었을 것이다. 눈과 얼음으로 덮여있는 이 코스가 아이에게는 쉽지 않았을 터이지만, 칭얼거리는 아이에게 왜 매리설산에 가서 기도해야 하는지 설명한 후 손을 꼭 잡고 여기까지 왔을 것이다. 세월이 흐르면 엄마 손을 잡고 이곳에 왔던 아이는 장성해 자신의 아이들 손을 잡고 다시 이곳을 찾겠지. 비가 오는 궂은 날임에도 불구하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젖어가며 산을 오르게 하는 마음은 어떤 것일까.

 







 

성스러운 폭포속으로 한참을 올라가다 보면 타르초가 휘날리는 곳에 표지판 하나가 서있다. ‘이곳은 장족의 성지이므로 경건한 마음을 가지고 목소리를 낮추어 주십시오. 이 지역 사람들의 삶과 문화, 그리고 신앙을 존중해 주십시오.’.
그들을 따라 산 길을 걷고, 돌탑에 이르면 조용히 돌을 쌓았다. 운무가 짙게 깔려 있어 산의 자태를 볼 수는 없었지만 그 너머의 위용에 취해 자박자박 탑 주위를 걸었다. 시계 방향으로, 신의 순리대로. 우리는 정상을 목표로 하는 원정대도 아니고, 인증샷을 찍으러 가는 관광객도 아니었다. 그들이 걷는 길을 잠시 빌려 같이 걷고 있을 뿐이었다.



 

 

 





비에 젖은 몸을 녹이러 작은 쉼터 모닥불 근처에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아이들은 지치지도 않는지 맨발로 의자 위를 뛰어다니고 있었고, 아버지는 분주히 물을 길어나르고 있었다. 모닥불에 데운 물로 아이들 발을 하나하나 씻겨주고, 모닥불에 젖은 양말과 신발을 뒤집어가며 말리고 있었다. 그리고 어머니 곁으로 가 똑같이 반복했고, 아내의 발까지 씻겨준 뒤에야 사내는 자신의 발을 녹였다. 특별할 것 없는 행동이었지만 아버지의 따뜻함이 어색한 내게는 큰 울림이었다. 잠시 후, 그 사내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고 힘든 코라순례를 하고 있는 그이들의 마음을 궁금해 하는 내게 사내는 이렇게 말해주었다.
 “산이 여기에 있으니까, 산이 있어서 왔어요. 모두가 무사히 왔으니까, 이렇게 온 것 만으로도 큰 축복이지요.” 사내는 ‘아쉽다’는 말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처럼 대답했다. 

실제로 이야기를 나누었던 티베트사람들 모두가 다 맑은 얼굴이었다. 궂은 날씨에 조금은 지친 기색도 있었지만 잔잔히 웃고 있었고, 아쉬운 기색보다는 행복한 얼굴에 가까웠다. 그들의 마음에는 무엇이 자리한 것일까.

 

산이 있는 곳 까지 가는 이틀간의 산길도, 산을 멀리서 바라볼 수 있는 전망대가 있는 마을도, 산을 오르는 길도, 산 속에 살포시 들어앉은 마을마저도 너무나 벅찬 아름다움이었다. 그 모든 자연의 모습들이 멋졌지만 무엇보다 좋았던 건 산을 찾은 티베트 사람들과의 인사. 내리막도 오르막도 참 극적인 산 길에서 숨이 턱까지 차 올랐을때 웃게 만들어주던 '타시텔레'. 태양에 그을린 검붉은 얼굴, 바람에 닳은 옷, 단촐한 짐을 한 그들과 주고받는 그 인사가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외지인에 대한 경계가 있을 법도 하고, 다른 채비에 경계나 불만의 표정이 드러날 법도 한데, 티베트 사람들은 모두 웃는 얼굴로 먼저 인사를 건넸다. 산에서 주고받는 그 인사는 수줍기보단 오히려 다부졌고, 씩씩했고, 구수했고, 힘이 나는 주문이었다.




 




 

# 여행과 일상사이
첫 번째 갔을 때에는 자세한 정보를 모른 채 갔기에 뚜렷한 기대랄 것도 없었고, 그렇기에 모든 것이 괜찮았다. 그저 그 산에 가고 싶었던 것이었고, 그 산에 갔으니 아쉬울 것이 없었다.
바로 이듬해, 12년만에 돌아온 양의 해에 다른 여행자들과 다시 한 번 매리설산을 다녀오게 되었다. 그 중 한명은 매리설산은 나쁜남자에 비유했다. 화가 난다고 했다. 우기 끝자락에 속했던 시기여서 내내 운무가 드리웠고, 비가 흩뿌려서 맑고 쨍한 산의 자태를 못봤기 때문일터. 고대하던 매리설산에서 ‘설’을 제대로 못보았으니 그럴만도 했다. 더군다나 쉽게 올 수 있는 곳도 아니기에. 이해한다고 했지만 왠지 모르게 미안했고, 아쉬웠다. 그렇지만 사실 내가 너를 온전히 사랑한다고 해서 다른 사람도 온전히 너를 사랑하길 바라는 마음은 내 욕심이었다. 아직 멀었구나.




 




 

사실, 아쉬운 마음도 좋은 마음도 한 끗 차이. 여행지에서는 참 쉬운데, 막상 현실로 돌아오면 그렇지 못한 경우가 허다하다. 우리는 여행지에서는 세상 모든 것들을, 차창 밖의 풀 한포기 놓치지 않으려 하는데 정작 일상에선 많은 것에 애써 눈감으려 한다. 여행지에서는 낯선 사람에게 의심 없는 무한한 친절을 베풀지만, 정작 일상에선 친절함을 기대하는 손길을 뿌리치고 의심으로 외면하게 된다. 여행지에서는 얼마나 자주 설레고 얼마나 자주 탄성을 지르는가. 그런데 일상에서는 기쁨에도 슬픔에도 고통에도 자주 무감각해지곤 한다. 여행지에서는 세상 어디에도 없는 긍정론자가 되어 불편한 그 모든 것들조차 기쁨으로 바꾸어버리곤 하지만, 일상에서는 작은 불평에 조차 걸려 넘어지곤 한다. 여행을 일상같이, 일상을 여행같이 지내면 좀 더 풍요로운 날들이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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