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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유의 가만히 #여행

가만히 티베트 여행 #3 우리의 밤은 당신의 낮보다 아름답다

지유의 가만히 #여행은  

여행을 통해서 나의 일상이 머무는 공간과 시간을 다시 확인하려 합니다. 개인적인 여행, 사람들과 함께했던 여행의 경험들을 글을 통해 나누려합니다. 여행은 새로운 즐거움과 관계들로 시작되고, 인생이라는 여행길을 함께하는 오래된 친구와의 만남과 익숙한 공간으로 끝이 나는 듯 합니다. 그러나 또다시 새로움을 좇으며 인생의 바퀴자국을 세상 여기저기에 남기고 있는 지금이 가장 행복합니다.  


티베트여행 #3

우리의 밤은 당신의 낮보다 아름답다


지금 다시 떠올려 봐도 웃음이 나고, 두고두고 기억하고 싶은 행복했던 순간이 당신에겐 있는가.


(왼쪽이 가지, 휴대폰을 들고 있는 쪽이 나. 여행의 충만한 감정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친구가 있다는건 정말로 행운이다.) 


  묵직한 두통, 저조한 컨디션, 목이 타는 건조함. 여행 이틀째부터 고산반응이 오는 것일까. 남녀노소, 체질에 상관없이 온다는 고산반응이 나한테도 찾아온 것 같다. 미리 처방받아갔던 다이아막스는 부작용 때문인지 얼굴에 경련이 일었고 좀 더 비싼 자이데나는 별 효과를 못 봤다. 조언에 따라 옷을 따뜻이 입고, 물을 계속 마시는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밥을 먹으러 들어가는 식당마다 뜨거운 물을 찾아 보온병에미리미리 채우는 일은 필수였다.  속으로는 나이가 들어서 이젠 배낭여행도 힘들구나 라는 생각이 맴돌았고 그 이후로 총 14박 15일의 여행에서 절반인 일주일 정도는 그렇게 두통과 불면증에 힘들어했던 것 같다. 여행을 와서 아팠던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재작년 신혼여행으로 10박 12일 여행을 떠났을 때에도 여행 초반부터 위경련에 체력이 바닥났던 것이다. 결혼식 당일이 워낙 정신없고 큰 행사여서 몸이 무리하지 않을 수 없던 건 사실이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여행을 갈 때마다 아팠던 건 아니다. '내가 하는' 여행에서만 유독 마음 놓고 아팠던 것 같다. 손님들을 모시고 갔던 인솔여행에서는 책임감 때문이었을까? 체력이 좋으신 것 같아요, 평소에 운동을 따로 하시나봐요 라는 얘기를 오히려 많이 들었던 것이다. 일이어서 그랬을까, 아프면 안된다는 생각이 나를 강하게 붙들어 메었다. 

 몸이 아프니 비로소 내 여행을 하고 있다는게 실감이 났다. 더 즐기지 못하는 것이 미련하고 아쉽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 여행이 좋다. 이건 나를 위한 여행이니까. 


<여행수업>

 이번 티베트 여행은 관광여행이 아님은 분명하다. 관광이 목적이었다면 칭짱열차를 타고 티베트의 수도인 라싸에 갔을테고, 포카라 궁전은 필수로 보고 왔을테다. 그러나 티베트의 정치적으로 탄압받는 현실을 알고 티베트 현지인들에게 도움이 되는 여행을 하자는 취지로 인솔자 Y는 티베트 공정여행이라는 타이틀을 걸고 여행을 진행했다. 그래서 Y는 될 수 있는한 저녁식사를 먹고 난 후에는 티베트의 정치, 종교, 지리, 문화 등을 설명하는 시간을 가졌다. 여행하는 동안 궁금했던 것들을 확인하는 시간이기도 하고, 여행하는 지역에 대해 더 깊이 배울 수 있는 시간이었다. 보통 관광버스 안에서 가이드님의 설명으로 듣는 얘기인데, Y는 인솔자 겸 가이드 역할까지 할 수 있는 분이었다.  한두시간에 걸쳐 티베트에 대해 공부를 하고 궁금한 사항을 질문받고 이후에는 더 원하는 사람들끼리 남아 2차를 가졌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그 2차가 맞다. 피곤하기도 하고 컨디션을 조절해야하기도 해서 난 수업(?)만 받고 숙소로 돌아가는 학생을 자처했다. 

(겉훑기 여행이 아닐 수 있었던 것은 8할이 저녁시간마다 시간을 내준 Y의 진지하면서도 명료한 설명 덕분이다. 사진 출처: 이후 보충)


<시가 흐르는 밤>

 하루는 이 여행에 함께 합류한 전직장 동료인 가지가 어젯밤에는 '시낭송'을 했다는 말을 했다. 왠 시낭송? 대륙이 워낙에 넓으니 차량으로 이동하는 시간도 길어서 무료한 시간에 Y는 시 쓰기를 추천했다. 그렇게 탄생한 시였을까? 밤에 모여있는 사람들 각자 준비해온 자작시를 낭송했다고 한다. 어떤 시였을까. 어떤 분위기였을까. 난 다시 한 번 '시라니? 참 낭만적이군.' 라고 생각했다. 이후에 술파티가 한창이던 어떤 밤, 뜬금없이 Y가 읊어주던 시가 얼핏 떠오른다. 

'... 백 만원. 

그래, 백 만원이면 한 달을 살아가는데 충분하다...'

시구가 정확히 떠오르진 않지만, 올해가 마지막 인솔이라며 한국에 돌아가서는 예전에 일하던 직장으로 3년만에 다시 돌아간다던 Y의 상황만이 정확하게 기억이 난다. 


<낮 여덟시간보다 밤 두 시간이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

 그래서 나도 그 날 이후로는 2차 모임에 발을 붙이게 되었다. 어떤 날은 서로 속이고 속는 소름돋는 마피아 게임을 했고, 또 어떤 날은 돌아가며 노래를 불렀다. 노래방 기계없이도 노래가 불러지는 그런 밤이었다. 지금 다시 떠올려 봐도 웃음이 나고, 두고두고 기억하고 싶은 행복했던 순간을 선물받은 날이었다. 

(왼쪽부터 은선, 유경, 나, 이슬 그리고 현종.  뮤즈가 한번쯤은 다녀갔을법한  음악의 밤은 평범한 호텔방에서 알코올과 함께 그 시작을 알린다.) 

음악의 밤은 누군가의 아주 달콤한 노래로 시작되었다. 걸그룹의 리드보컬 만큼이나 뛰어난 노래실력이었다. 누군가는 (너에게) 반하기 10초 전! 5초 전! 을 외치며 응원인지 놀림인지 알 수 없지만 배꼽잡게 재밌는 상황을 연출했다. 늘 조용히, 풍경 스케치를 즐겨하던 누군가는 김동률의 노래를 완벽하게 멋진 목소리로 불렀다. 가지와 나는 각자 어떤 노래를 불러야할지 모르겠다며 바라보았다. 사실 가지와 나 둘 다 노래를 너무나 좋아하지만 잘 부르진 못한다. 그러다 가지가 나보다 먼저 노래를 불렀고, 노래를 함께 즐기는데엔 가창력은 문제되지 않는다는 걸 보여주었다. 물론 내게도 어김없이 차례가 돌아왔다. 지금 다시 불러보려하면 낯부끄러워 어렵지만, 그땐 신기하게도 그냥 불러졌다. 그리 애쓰지 않아도, 노력하지 않아도 모든게 편안한 그런 밤이었다. 

(노래하는 나. 선곡은 싱어송라이터 오지은의 '오늘은 하늘에 별이 참 많다'. 사진출처 : 윤)


이번 여행의 막내 찬이는 노래대신 태권도 시범을 보여 모두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고, 열 다섯살의 열하는 데미안 라이스에 버금가는 목소리로 누나들의 마음을 눈 녹이듯 녹였다. 

나와 동갑인 친구 한 명은 꾸밈없는 담백한 목소리로 싱어송라이터 시와의 노래를 읊조렸다. 열여덟 명이 모인 불꺼진 방안에는 그녀의 목소리만이 들려왔다. 모두들 숨죽이며 들었고, 노래에 취해 가사 한 마디 한 마디를 음미했다. 그날 밤 그녀의 선곡은 탁월했고 난 이 밤이 끝나지 않길 바랬다. 


여기 앉아서 좀 전에 있었던 자리를 본다 
아. 묘한 기분 저기에 있었던 내가 보인다 

저 하늘 저 나무 저 그늘 저 계단 여기서도 저기서도 똑같아 보일까 
저 하늘 저 나무 저 그늘 저 계단 거기에 있었을 땐 볼 수 없었지 

흐르는 물소리 떨어지는 꽃잎 발소리 내는 것도 조심스럽게 
흐르는 물 속에 세상이 비치네 내 얼굴도 비춰볼까

-시와 1집 중 '랄랄라'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

 얼마전 전직장 동료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던 중 오랜만에 인솔 이야기가 나왔다. 저녁 자유시간에는 인솔자를 찾지 않아도 될 만큼 최대한 미리 안내사항을 알려주었다는 이야기, 마음 터놓고 친한 것 같다가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할 말 하고 보는 손님들에게 상처받았다며 손님은 손님일 뿐이라는 충고들. 나 또한 인솔자로서 미숙하고 아마추어였던 입사초기에는 손님들의 말 한 마디에 생채기가 나고, 그래서인지 손님과는 거리를 두는게 익숙했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서 좀 더 여유가 생겨서 그런지 저녁에 맥주도 한 잔 같이 마시러 나가곤 했지만 여전히 내겐 인솔은 일(업무)이었고, 손님들과의 관계보다는 일정을 진행하는 역할에 매몰되어 있었다. 차질없이 인솔을 하고 돌아왔지만 마음 한 구석의 허한 느낌은 사라지지 않았다. 

 티베트 여행을 하면서 나는 카메라 렌즈를 풍경에서 사람으로 돌렸다. 손님들의 부탁으로 똑같은 배경에 사람만 달라지는 사진이 아닌, 내가 기억하고 싶은 상대의 모습과 표정을 담아내는 사진을 찍었다. 그러다보니 사람마다 자주 짓는 표정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고, 홀로 있을 때 어떤 포즈를 취하는지 미소는 어떻게 짓는지 자세히 관찰하게 되었다. 어떤 말을 굳이 건네진 않았지만 사람을 내 눈과 마음에 담을 수 있는 시간이었다. 거리를 두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사실 관심 가지지 않고, 관심 받지 않는 것이 편하게 여겼었지만 이내 잘못된 생각임을 알았다. 함께 여행하는 사람들과 시간을 감정을 좀 더 섞으며 지냈어야 했고, 더 많은 생각들을 나눌걸 하는 아쉬움이 생긴다. 그렇지만 오랫동안 끼우지 못했던 단추를 끼우고 온 여행임에는 틀림없다. 여행을 하는 장소보다 중요한건 여행을 함께하는 사람들임을 깨달았다. 연말에는 다함께 점심식사 모임을 했고, 이번 달 말에는 신년 모임 겸 또 한 번 후속모임을 하기로 했다. 우리의 여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여행 전 일정동안 운전을 해주신 기사님들과 마지막 밤을 보내며 기념 사진을 남겼다. 한국에서 챙겨간 폴라로이드 카메라가 한 몫 톡톡히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