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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버리의 여행잡담

라오스 잡담 #2 : 회색의 도시 비엔티안

<차버리의 여행잡담>

본격적인 여행을 시작하게된 20대 초반 이후, 

여행은 꿈, 노동, 삶 그 자체로.. 다양한 모습으로 형태를 바꾸어 나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기획자와 여행자로서의 관점을 제멋대로 넘나들며

여행 중 '다름'을 목격하고, 우연히 만난 여행인연들과 부대끼며 떠올랐던 이런저런 생각들을 남기려 한다.



  


한창 공사중인 건물이 많은 비엔티안. 도로와 거리는 수도치고 한산한 편이다.



낮에 본 비엔티안의 첫인상은? 회색의 도시.


중요한 인솔을 앞두고, 사전답사 차 처음으로 발을 디딘 곳이 바로 이 곳이다. 현지발음으로는 위엥짠이라고 한다.

한국에서 라오스를 여행하는 사람들에게 첫 인상을 남기는 비엔티안은 서울의 4분의 1 정도 크기로 약 70만 명이 살고 있다.


'수도'라고 하면 우리가 흔히 떠오르는 하늘을 찌를 듯 높이 솟은 빌딩, 복잡한 교통체계, 사람들로 바글바글한 거리, 매캐한 매연과 소음...

이런 그림은 볼 수가 없다. 규모도 아담하고, 건물은 빽빽하지 않으며, 거리는 한산하다.

정부청사와 대사관들이 위치한 구역과, 호텔, 레스토랑, 바가 몰려있는 세따띠랏, 삼센따이 거리의 번화가를 제외하면

지방의 도시와 구별하기 어렵다. 한 문장으로 말하자면, 수도이긴 하지만 대도시는 아니다.

 

낮에 본 비엔티안의 첫인상은 이러했다. 색감이 부족한 회색빛의 도시.

몇몇 식민지풍의 저택들을 제외하면, 현대에 지어진 건물들의 디자인은 개성이 없고 투박하기만 하다.

공사중 팻말을 걸고 방치된 건물도 유독 많았고, 수도에서만 느낄 수 있는 특유의 활기가 이 곳에는 없었기 때문에 (아마도 사람이 적어서)

라오스에 대한 첫 느낌이 사실 그리 매력적이진 않았다.

 

이웃나라들의 수도와 비교했을 때, 관광자원이 풍부한 것도 아니다.

일반적으로 방문하는 관광지인 파탓루앙, 왓시사켓, 호파깨우, 파뚜싸이 그리고 시내와는 거리가 조금 있는 부다파크 외에는..

여행자들은 "딱히 볼게 없다(not much to see)" 고 말하며 다른 도시로 금방 이동해 버린다. 
몇 백 년동안이나 라오스를 대표해왔던 도시에 왜 볼 것이 없다는 걸까?
여기에는 사연이 있다.

 


왓시사켓의 머리잘린 불상들. ⓒAdam Groffman



침략과 약탈이 도시를 쓸어버리다. 


비엔티안은 1560년 란쌍왕국의 수도가 되었다. 란쌍왕국은 최초로 라오스를 통일한 고대국가로, 14세기에 세워져 18세기에 분열되기 전까지 번성했다. 이전의 수도는 루앙프라방이었다. 그때부터 17세기 무렵까지, 비엔티안은 동남아시아의 문명화된 도시 중의 하나였다. 정치, 사회, 경제, 문화의 중심지였고 메콩강변에는 황금빛의 궁전들이 아름다움을 자랑했다.

 

하지만 1828년 시암의 군대가 쳐들어와 도시를 불태우고, 이 때 두 도시로 나뉘어졌다. 메콩강을 중심으로 오른쪽은 시암의 영토가 되고, 왼쪽편만이 라오스의 영토로 남았다. 현재 비엔티안은 예전의 반인 것이다. 도시 전체와 거의 모든 사원이 불탔고, 불상과 보물들을 약탈당했다. 이로부터 60여 년 후, 프랑스가 보호령으로 정하면서부터 도시를 재건하기 시작했다. 황금탑 파탓루앙과 에메랄드 불상을 모시던 사원인 호파깨우도 이 때 다시 지어졌다.

  

비엔티안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사원인 왓시사켓에는 6천 여개의 크고 작은 불상들이 안치되어 있는데, 많은 불상들의 머리 부분이 훼손되어 있다.

불두佛頭 안에 있는 보석을 약탈하기 위해서라는 설과 불상의 목을 쳐서 적국의 신성을 훼손하기 위해서라는 설이 있다.

  

비엔티안은 태국 외에도 베트남, 버마, 크메르, 프랑스에 의해 침략당했고, 심지어 2차 세계대전 말기에는 일본에 점령된 적도 있다.


이토록 외세에 시달려온 도시는 일본 패망 이후, 드디어 독립을 하는 듯 했지만, 우리나라를 비롯한 아시아의 많은 피식민지 국가들이 겪었듯이 20여 년 간 같은 라오인들끼리 격렬한 내전을 벌이게 되었다.

 

비엔티안의 현재는 이렇듯 끊임없는 폭력에 시달려온 역사의 산물인 것이다. 

내전의 결과 자국의 공산세력이 집권하게 되면서 개발이 늦어진 영향도 있다. (1986년 자유시장경제체제를 채택한 라오스는 시장을 개방한 역사가 30년도 되지 않는다.)

 

암울한 배경설명은 이 쯤으로 해두자. 



한강일까, 메콩강일까?

 


밤이 되면 빛을 발하는 도시. 메콩강이 첫인상을 바꾸다.

  

해가 지면 메콩강변에 매일 야시장이 선다하여, 답사할 겸 강쪽을 향해 거리를 걸었다.

대부분의 여행자들이 잠을 자고, 밥을 먹는 번화가에서 메콩강 나이트마켓까지는 걸어서 10-15분 거리다.

밤이 되니, 밋밋해 보였던 거리에는 조명이 켜지고, 건물에서는 음악소리가 들리고, 막 퇴근한 현지인들도, 여행자들도 저마다 저녁시간을 즐기며 회색의 도시에 생기를 불어넣기 시작했다. 덩달아 나도 신이 났다.

 

메콩강변에 도착해보니, 와, 라오스 사람들 다 여기에 있었구나. 했다.

그래. 지금 딱 가을밤의 한강공원 풍경처럼 시민들이 낮의 더운 기운(아마 학교와 직장에서 받았을 스트레스도)을 식히고 있었다.


메콩강을 따라 길게 놓인 도로는 밤이 되면 차량을 통제하여, 사람들의 공간이 되었다.


잔디밭에 둘러앉아 수다를 즐기는 가족, 헤드폰을 끼고 조깅하는 여성, 군것질하는 꼬마, 팔짱을 끼고 야시장을 구경하는 연인들..

힙합음악에 비보잉 하는 10대 무리...

 

잠깐, 힙합?

라오스와 힙합이라니. 신선한 충격이었다.

이 때 바로 라오스에 대한 선입견이 얼마나 크게 자리잡고 있었는지 깨닫게 되었다. 


라오스 뿐 아니라 다른 나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가난한 나라, 순수하고 수줍은 사람들' 이라는 많은 사람들이 상상하는 이미지는 사실 호의보다는 우월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그날 밤, 비엔티안에서 목격한 모습들은 우리가 여가를 즐기는 것과 별 다를 것이 없어보였다. 어쩌면 더 여유로울지도 모르겠다.

GDP나 임금 같은 숫자들에 대해서 말하자는 게 아니다.

이후에도 다른 지역을 돌아다니며 마주한 풍경들과 라오인들과의 대화를 통해, (내 안에서) 라오스는 점차 '가난한 나라'에서 '제법 살기 좋은 곳'로 바뀌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