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차버리의 여행잡담

<쉬어가는 코너> 혼자 하는 여행 vs 둘이 하는 여행 #3


<차버리의 여행잡담>

본격적인 여행을 시작하게된 20대 초반 이후, 

여행은 꿈, 노동, 삶 그 자체로.. 다양한 모습으로 형태를 바꾸어 나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기획자와 여행자로서의 관점을 제멋대로 넘나들며

여행 중 '다름'을 목격하고, 우연히 만난 여행인연들과 부대끼며 떠올랐던 이런저런 생각들을 남기려 한다.



<글쓴이가 쉬고싶어 쉬어가는 코너> 

혼자 하는 여행 vs 둘이 하는 여행 #3 



"여행을 계획할 때 어디로 갈 것인가 만큼 중요한 고려요소가 하나 있다.

누구와 여행할 것인가? 혼자 떠날 것인가, 둘이 떠날 것인가?"



H랑 나. 스페인 해변 어딘가 ⓒ 차버리


친구와 함께 하는 해외여행은 진짜 재미있다. 애인과 여행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 같다

이런 생각을 하게 해준 친구가 있다. 친구 H.

H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친구로 우리는 내성적인 성향과 우울 끼가 다분한 점이 비슷했다. 내가 그나마 조금 더 나대는 성격이라는 점이 차이겠다서로 다른 도시로 대학 진학을 하다 보니 자주 연락을 하거나 만나지는 않았었다.


아일랜드에서 쭈구리 시절을 보내고 있을 무렵, 그 친구는 프랑스 남부에서 교환학생 중이었는데 역시 쭈구리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귀국 전 한 달간의 여행을 계획하고 있었는데, H의 방학기간과 잘 맞아 같이 여행하기로 했다.

스페인 안달루시아와 모로코, 이탈리아 밀라노까지 동행 후, H는 프랑스로 돌아가고 나는 발칸반도로 여행을 이어나가는 일정이었다. 스페인 남부의 말라가라는 해안도시에서 하루 일찍 먼저 도착해 H를 기다렸다. 겨울의 안달루시아는 휑했다. 날씨가 따뜻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하늘은 맑고 햇빛은 뜨거웠다. 그것으로 만족했다. 호스텔에는 스웨덴에서 일하다가 휴가 온 아저씨와 나 단 둘뿐이었다. 아저씨의 고향은 아프리카의 한 나라인데 나와 같은 이유에서 스페인을 여행지로 택했다. 햇빛 쐬러.. 스웨덴의 겨울은 낮이 5시간 정도밖에 안 된다고 했다. 내가 아일랜드에서 쭈구리 시절을 보낸 가장 큰 이유가 바로 날씨였는데 안 겪어본 사람은 모를 것이다


다음날, 아일랜드와 프랑스에서 온 두 쭈구리가 재회했다. 동네 야채가게에서 재료를 사서 그 동안 열심히 갈고 닦은 스파게티 실력을 뽐냄으로써 재회를 축하했다. 둘 다 까다롭지 않은 성격에 여행 성향(“여유롭게 다니자”)도 비슷해서 별다른 의견 다툼 없이 여행은 순조롭게 이어졌다. 안달루시아의 온갖 명소에서 고등학교 시절처럼 이상한 셀카를 찍어대며 별 것 아닌 일에 낄낄대며 즐거웠다. 맛있는 음식에 같이 감동하고. 숙소에서 치맥을 나누며 여행의 피로를 풀었다. 순조로운 여행길이었다.


사건은 그라나다에서 터졌다. 낮에는 알함브라 궁전을 구경하고, 저녁산책을 하던 중이었다. 어두운 언덕 위에 몇 십 명의 히피들이 몰려와 불을 피우고 음악을 연주하고 놀고 있었다. 장차 히피가 되는 것이 꿈이었던 나는 발정난 개처럼 흥분을 하며 저들과 어울리고 싶었지만, H는 뭔가 탐탁지 않았는지 안 좋은 표정으로 자기는 다른 곳에서 기다리겠다고 했다. 예상치 못한 그 애의 태도에 나는 행동에 제약을 느끼며 갈팡질팡했다. 사람들과 몇 마디를 나누다가 집중 못하고 H를 찾아갔다. 왜 같이 어울리지 않느냐고, 그게 더 재미있지 않느냐고 물었던 것 같다. 그러자 H난 너랑 다르다고! 불편하다고!”라고 화를 냈다. 나는 당황했다. 전혀 몰랐기 때문에. 나도 모르게 나만 생각하고 내가 좋아하는 것을 H에게 강요했었고, 그 애는 부담스러웠나 보다. 그 짤막한 다툼이 어떻게 정리되었는지는 기억이 안 나지만 그 날 바로 풀렸던 것 같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후 우리는 정말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정말 질펀(?)하게 어울려 놀게 된다. 그 시작은 타리파였다.


타리파 사람들 ⓒ H


스페인의 남단, 모로코로 건너가는 항구도시 타리파는 관광지가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배 시간에 맞춰 1박을 하기로 했다. 인적이 드문 골목골목을 싸돌아 다니고 있었는데, 어딘가에서 음악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를 따라가보니 건물로 둘러싸인 작은 광장, 한 펍 앞에서 현지인들이 대낮부터 잔치를 벌이고 있었다. 스피커에서는 미카엘 뗄로의 Ai Se Eu Te Pego가 흘러나오고, 마을 꼬마들과 어른들이 춤을 추며 술을 마시고 있었다. 알고 보니, 한 언니의 25번째 생일잔치 겸 폐업잔치였다. 술집이 문을 이제 닫는다고, 마을 사람 대상으로 술을 내놓고 잔치를 벌인 모양이었다. 그들은 난데 없이 나타난 우리를 환영해주었다. 무한리필 맥주와 와인. 그리고 테이블에 수북이 쌓인 싱싱한 성게.. 아니, 이게 왠 럭키? 나는 이미 정신을 잃고 잔에 술을 받다가, 아차 싶어 H를 쳐다보았다. 웬걸, 웃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이 새로운 외부인들의 등장에 신기했는지 들이대자 H는 처음에는 조금 어색해하다가 마음을 열고 같이 어울려 놀았다. 그때는 미처 제목을 몰랐던 노래 Ai Se Eu Te Pego는 참으로 신명나는 곡이었다. 마카리나처럼 중독성 쩌는댄스를 꼬마가 추기 시작하자, 빨간 모자 할아버지도 약간 변태 같은 아저씨도 생일 맞은 아가씨도 동네 개들도 우리도 따라 췄다. 해가 저물기 시작하자 자리를 정리하고 2차로 한 청년이 하는 바로 갔다. 가는 길에 파랗고 빨간 노을이 되게 아름다웠는데 그때 이미 취해있었던 것 같다. 바에서는 동네 애들에게 포켓볼을 알려주며 놀았다. 바 위에서는 동네청년들이 음악에 맞춰 바지를 벗고 현란한 컬러의 빤쮸를 자랑하며 춤을 춰댔다. 한 청년은 H에게 전화번호 대신 페북주소를 땄다. 반한 듯 했다. 나한테는 안 땄다. 이 날의 끝은 기억에 없다.. 어쨌든 안달루시아에서 약간은 쳐졌던 우리 여행이 이 흥 많은 동네에서 탄력을 받은 듯 했다.


셰프샤우엔 여학교 ⓒ 차버리


배를 타고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도착한 모로코. 셰프샤우엔의 푸르른 골목길을 싸돌아다니다가, 소녀들이 한 건물 앞에서 수다를 떨고 있길래 말을 걸다가(물론 안 통하지만), 이 곳이 학교라길래 들어가봐도 되는지 슬며시 물었다. 허락을 맡고 들어갔다. 학교는 2층의 아담한 사각형 건물로 공부공간, 생활공간, 부엌 등으로 이루어졌다. 리프 산맥이 고향인 소녀들 20-30명 정도가 마을로 내려와 함께 머물며 공부하는 기숙사형 학교였다. 2층 난간에 걸려있는 빨랫감들이 정겹게 느껴졌다. 같이 놀다가 타리파에서의 흥이 꺼지지 않았는지 소녀들에게 노래를 불러달라고 요청했다. 어떤 노랫말인지는 몰라도 참 예쁘고 아름다웠다. 이번엔 우리 차례였다. 먼저 시킨 건 나면서 막상 멍석을 깔아주자 당황해 하고 있었는데, H가 갑자기 남행열차를 부르기 시작했다. 왜 하필 남행열차였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나도 같이 불렀다. 마침 식사시간이어서 아주머니들이 차려주신 식당밥보다 열 배 더 맛있는 꾸스꾸스를 함께 먹은 후에, 몇 명의 소녀들이 우리를 구경시켜주겠다며 같이 마실을 나섰다. 그 날 H는 나보다 더 행복해했고 소녀들과 헤어질 때 굉장히 아쉬워했다. 새삼 정 깊은 애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하라. 낙타대신 짚차 ⓒ H


스페인과는 달리 모로코에서는 정말 다채로운 사건들이 많았다. 그럴 때마다 크게 스트레스 받지 않고, 숙소에 돌아와 오늘 일어난 일들을 어이없어 하며 웃을 수 있었는데, 그건 H와 함께였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의 마지막은 밀라노 역에서였다. 내가 베네치아행 기차에 올라타기 전, 우리는 서로 꼬옥 안아주었다. 고마움과 미안함과 서운함이 뒤섞인 포옹이었다. 눈물도 글썽였던 것 같다. 혼자 탄 기차 안에서 우리의 여행을 돌이켜보았다. 뭔가 재미있을 것 같은 곳이 보이면 저기 가보자!”라고 말했던 것은 항상 나였지만, 글쎄, H가 없었다면 난 그곳을 그냥 지나쳤을지도 모른다. 겁이 났겠지. 어떻게 되든 서로가 있으니까 하는 믿음에 낯선 사람들 속에서도 걱정 없이 마구 어울려 놀았던 것 같다. H덕분에 마주쳤던 우연과 만남과 어울림, 그런 순간들이 아직까지 기억 속에서 반짝이고 있다. H는 모르겠지만, 이 여행이 인생에서 가장 재미났던 여행이다